《사물인식, 인공지능(AI), 빅데이터… 첨단 기술이 사람을 위한 따뜻한 기술로 진화하고 있다. 사물을 구별하고 글까지 읽는 AI는 시각장애인의 ‘눈’이 됐다. 사회 문제를 기술로 푸는 소셜벤처 기업을 소개한다.》
“아리아, 앞에 뭐가 보여?” “텍스트 감지. ‘모니터에 사번을 입력해주세요’, ‘필요 시 유니폼으로 환복해주세요’, ‘소지품은 잘 챙겨주세요’….”
SK텔레콤의 장애인 표준사업장인 ‘행복한울’ 헬스케어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시각장애인 안마사 위민수 씨(44)에게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앱) ‘설리번플러스’는 든든한 동반자다. 스마트폰 카메라가 전방의 물체를 인식하고, 이를 음성으로 전달해 위 씨의 이동이나 사물 인식 등을 돕는다. 처음 만난 이의 명함을 읽어주고, 얼굴을 인공지능(AI)이 인식해 나이·성별 정보를 전달하기도 한다.
여행지에서도 주요 명소의 역사나 특징을 소개하는 안내문을 읽지 못해 아쉬웠지만 설리번플러스의 도움으로 불편함이 해소됐다고 한다. 위 씨는 “스마트폰에 앱을 많이 깔아 놔도 볼 수 없으면 무용지물인데 설리번플러스 덕분에 잘 활용하고 있다”며 웃음을 지었다.
사물 인식, AI, 빅데이터 등의 정보기술(IT)을 통해 장애인들의 시각적·청각적 불편함이나 사회적 난제 등을 해소하는 ‘따뜻한 기술’이 소셜벤처를 중심으로 확산하고 있다. 소셜벤처들은 “기술의 ‘발전’도 중요하지만 기술의 ‘적용’을 통해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들을 풀어 나갈 수 있는 고민도 함께 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시각장애인들의 눈이 돼 주는 기술, 세계에서도 호평
2018년 개발돼 국내에 출시된 설리번플러스는 현재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관심을 받고 있다. 시각장애인들이 유튜브 등을 통해 자신의 언어로 이 앱을 사용하는 방법을 서로 공유하는 ‘생태계’까지 구축된 상태다. 현재는 SK텔레콤의 AI플랫폼 ‘누구’와 협업해 기능을 고도화하고 있다. 투아트의 조수원 대표는 “세상이 ‘디지털화’되며 편리해지고 있지만 소외되는 사람들도 많다”며 “시각장애인들의 접근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을 고민하던 중 서비스를 개발하게 됐다”고 말했다.
스타트업 ‘닷’도 시각장애인을 위한 제품과 서비스를 개발하고 있다. 2017년 세계에서 처음으로 점자 스마트워치인 ‘닷 워치’를 내놨고,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에서 장애인뿐 아니라 비장애인도 사용할 수 있는 ‘닷 배리어프리 키오스크’를 처음 선보였다. 지난해에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태블릿PC인 ‘닷 패드’를 만들었다.
닷 패드는 촉각 디스플레이다. 수천 개의 핀이 상하로 움직이면서 글자뿐 아니라 표, 그래프 등 그래픽 요소를 나타내 시각장애인이 접할 수 있는 정보의 폭을 획기적으로 넓혔다. 최근 애플의 아이폰, 아이패드와 연동해 사용할 수 있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화제가 됐다. 올해 9월부터는 미국 교육부를 통해 미국 내 시각장애인 학교에 닷 패드를 공급할 예정이다.
김주윤 닷 공동대표는 “미국에 있을 때 세 차례 창업해 봤고 사업도 나름대로 잘됐지만 의미와 보람을 찾기 어려웠는데 교회에서 시각장애인이 부피가 큰 종이 점자 성경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고 느낀 점이 많았다”며 “이후 시각장애인과 관련 단체 등 수십 명을 인터뷰하면서 시각장애인들에게 눈이 되는 서비스 개발에 나서게 됐다”고 했다.
소셜벤처 ‘오파테크’는 2015년부터 시각장애인에게 점자를 가르치는 IT 기기 ‘탭틸로’를 개발했다. 학부모나 선생님이 선택한 언어가 점자로 변환돼 기기에 표시되고, 시각장애인 학습자는 그 점형(點形)을 익힐 수 있다. 점자를 모르는 사람도 점자를 가르칠 수 있는 게 특징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대면 수업이 제한되자 교사가 비대면으로 탭틸로를 제어할 수 있는 식으로 업그레이드가 이뤄지고 있다. 오파테크의 이경황 대표는 “점자 교육 입문뿐 아니라 점자를 익히고 난 이후에도 활용할 수 있는 제품을 준비 중”이라고 말했다.
○ 음성을 수어와 문자로… 자동통역 기술도 개발 중
음성언어를 청각장애인들의 언어인 ‘수어’로 변환시키는 기술도 소셜벤처를 중심으로 개발이 진행 중이다. AI수어통역 시스템 ‘스마트 수어, 손말’ 개발을 진행 중인 ‘함께 걷는 미디어랩’의 박성환 대표는 “우리가 쓰는 말이 ‘소리언어’인데 청각장애인들은 소리에 대한 경험이 없어 의미 파악을 위해 비장애인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써야 한다”고 했다. 이에 박 대표는 청각장애인의 문해력을 키우기 위해 음성과 수어를 자동 통역해주는 시스템 개발에 나섰다. KT도 사회적경제기업 지원 프로그램 ‘따뜻한 기술 더하기 챌린지’를 통해 기술 고도화를 지원 중이다.
현재 자동통역 시스템은 데이터 축적을 위한 대규모 연구와 개발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에 박 대표는 많은 수어 데이터를 쌓고 당장 통역이 필요한 청각 장애인들을 돕기 위해 ‘청각장애인-수어통역사-비장애인’ 간 3자 영상 통화 연결을 도와주는 모바일 앱을 준비 중이다. 사실 첨단 기술은 아니다. 이미 영상 통화를 위한 전용 단말기가 있다. 하지만 이 기능을 스마트폰에 접목해 접근성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고객이 불편을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할 때 그것이 항상 ‘첨단’과 ‘혁신’일 필요는 없잖아요. 신규성과 혁신성도 중요하지만 ‘사회문제 해결’에도 초점이 맞춰졌으면 합니다.”
청각장애인 택시 기사를 채용해 운영하는 플랫폼도 생겨나고 있다. ‘코액터스’가 운영하는 ‘고요한 M’이 그 주인공이다. 택시 내에서 승객과 청각장애인 기사가 의사소통할 수 있는 태블릿 기기를 개발해 지난해 기준 111명의 청각장애인 택시 기사를 배출했다. SK텔레콤과의 협업을 통해 차로 이탈 및 보행자 추돌 등 각종 위험을 시각이나 진동 등으로 경고하는 첨단 운전자 보조 시스템(ADAS)으로 운전자의 안전한 주행을 지원하고 있다.
‘소리를 보는 통로(소보로)’는 청각장애인을 위해 실시간 문자통역 서비스(STT)를 개발했다. AI를 기반으로 음성을 인식해 문자로 실시간 바꿔준다. 대표적인 제품은 컴퓨터에서 작동되는 소프트웨어인 ‘PC소보로’와 태블릿에서 작동하는 앱 ‘소보로 탭’ 등 두 가지다. 개인뿐 아니라 교육기관, 회사, 공공기관 등에서도 이용되고 있으며 서비스 누적 이용 시간이 4만5000시간을 돌파했다.
창업자인 윤지현 대표는 포스텍에 재학 중이던 2016년 IT 제품 기획 관련 수업을 수강하면서 아이디어를 착안했다. 청각장애인에게 꼭 필요한 기능을 담기 위해 청각장애인 수백 명을 만나 직접 이야기도 들었다. 윤 대표는 “앞으로도 좋은 보조공학 소프트웨어들을 꾸준히 제공할 수 있도록 개발을 지속해 나가겠다”고 말했다.